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다나카 회담 (문단 편집) === 장제스의 일본행 === 장제스 하야 이후 불과 한달이 지난 9월 즈음에 장제스의 정적인 왕징웨이도 [[서산회의파]] 등의 맹렬한 비난을 받고 사퇴했고 장제스 복귀를 요청하는 청원과 시위가 많았으나 장제스는 복직을 시기상조라 여겨 복귀 대신에 [[후한민]], [[허잉친]], [[우징헝]]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견문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다. 이때 장제스는 "향후 최소 5년의 시간을 갖고 정치와 경제학 공부에만 전념하겠노라"고 말했다. 원래 여행 목표는 세계일주였으나[* 일본에서 정치, 사회학, 독일에서 철학, 군사학, 프랑스에서 정치, 사회학, 영국에서 정치, 경제, 해군, 미국에서 철학, 경제, 이탈리아에서 정치, 사회학, 터키에서 혁명사를 배울 계획이었다고 한다.] 급박한 정세 때문에 이것이 가능할지는 의문스러웠다. 9월 22일 시커우를 떠나 상하이로 향한 장제스는 9월 28일 상하이 호를 타고 9월 29일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일본에 도착한 장제스는 일본의 발전상을 보고 크게 감탄했다. ||일본이 발전하는 속도는 놀랍다. 일본은 또한 교육과 사회질서도 한단계 향상시켰다. 일본에 오기 전에, 물질적인 발전은 반드시 정신적인 타락을 일으킨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일본이 여전히 전속력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27년 10월 4일, 장제스의 일기|| ||일본의 건설은 두 배의 속도로 가속화되고 있다. 언제쯤에야 우리나라가 똑같은 일을 하게 될지 모르겠다!|| ||1927년 10월 21일, 장제스의 일기|| 일본에 도착한 장제스는 상당히 극진한 대접을 받았는데 그가 공직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고위 공직자를 위한 의전을 받았다. 장제스는 과거 자신이 복무했던 13사단의 사단장 나가오카 가이시 장군을 만나 그에게 존경을 표시했고 나가오카는 장제스를 크게 환영했다. 10월 3일 고베에 도착해서는 고베의 화교들이 장제스에게 연설을 요청하였고 장제스는 크게 감명받았다. ||중국인이건 아니건, 늙었건 젊었건, 남성이건 여성이건 간에 모두 나를 너무도 존중해 준다.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1927년 10월 3일, 장제스의 일기|| 장제스는 고베의 아리마 온천에 위치한 그랜드 호텔에서 요양 중이던 쑹메이링의 어머니 예계진(니구이전)을 만나 쑹메이링과의 결혼 승낙을 얻어냈다. 그간 예계진은 장제스가 기독교도가 아니며 이미 아내가 있다는 이유로 쑹메이링과 그가 결혼하려는 것에 대해 반대해왔으나 장제스는 이제부터 성경 공부를 할 것이며 이미 전처와의 관계는 정리되었다며 예계진을 설득하여 승낙을 받아낼 수 있었다. 장제스는 일본 국민들을 상대로 서로에 대한 오해와 나쁜 감정을 제거하고 실질적인 공존과 공영을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